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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유산

디지털 유산 관련 국내외 판례와 법적 이슈

1. 디지털 유산의 개념과 법적 공백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란 사망자가 생전에 보유했던 모든 디지털 형태의 자산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이메일, SNS 계정, 클라우드 저장소, 디지털 지갑, 온라인 구독 서비스, 유튜브 채널, 암호화폐, 디지털 아트워크 등이 포함된다. 문제는 이러한 자산이 전통적인 민법상의 '유산'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소유권은 존재하지만 플랫폼 이용 약관에 따라 **‘실질적 소유가 아닌 사용권’**만을 부여받은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사망 이후 해당 자산의 상속 여부, 열람 권한, 삭제 또는 유지 가능성이 복잡한 법적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정의 자체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 민법은 재산상 권리를 상속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디지털 자산이 이를 포함하는지에 대한 판례나 명확한 규정은 아직 부족하다. 개인정보 보호법 역시 사망자의 개인정보 보호 범위를 다루지 않아, 사망 이후의 정보 접근이나 활용에 대해 일관된 기준이 없다. 이처럼 디지털 유산은 법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으며, 플랫폼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지는 일이 많다.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는 이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증가하고 있으며, 각국의 판례는 이 문제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디지털 유산 관련 국내외 판례와 법적 이슈



2. 독일·미국 등 주요 판례: 상속과 정보 접근의 경계
2018년 독일 연방대법원은 디지털 유산 관련 국제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킨 중요한 판결을 했다. 페이스북 계정을 사용하던 15세 소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유족은 사망자의 메시지 내용 등을 열람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유족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최종적으로 대법원은 “디지털 유산도 물리적 유산과 동일하게 상속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플랫폼의 이용 약관보다 상속법이 우선할 수 있다는 중요한 법적 전환점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는 애플과 관련된 판례다. 2016년, 사망자의 유족이 아이클라우드 계정 내 사진과 메일을 열람하려고 했지만 애플 측은 거부했다. 결국 해당 사건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상원에서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를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디지털 자산에 대한 신탁 관리자의 접근 권한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이 법은 디지털 계정이 일반 자산처럼 상속할 수 있으며, 사망자의 생전 동의나 유언이 있다면 신탁관리인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 판례는 디지털 유산에 대해 프라이버시 보호와 유산 권리 간의 충돌을 조율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플랫폼이 사용자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망 이후에도 폐쇄적으로 운영할 경우 유족의 권리를 침해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따라 법원은 개별 사건을 통해 점진적으로 새로운 법 해석을 내놓고 있으며, 이는 향후 입법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3. 한국 내 판례 및 제도 논의: 아직은 시작 단계
대한민국은 디지털 유산 관련 판례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현재로선 명확한 법적 기준이 부재한 상태다. 다만, 202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나온 한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사망한 자녀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열람하고자 한 부모가 카카오 측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이에 대해 법원은 **“명백한 유언 또는 사전 동의 없이는 열람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사례는 국내에서 사망자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디지털 자산이 유족에게 곧바로 상속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한편, 2022년 국회에서는 '디지털 자산 상속법' 혹은 '디지털 유산 법제화'에 대한 공청회가 열린 바 있으며, 학계와 법조계는 디지털 유산을 민법상 재산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법안 발의나 통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각 플랫폼이 제각각의 ‘사후 계정 처리 정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족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하거나 상속 절차를 밟는 데 어려움이 많다.

현재로선 법원이 발급한 사망 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위임장, 유언장 등을 바탕으로 플랫폼과 개별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 유일한 실무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법적 강제력이 없어, 서비스 제공자가 거부하면 그대로 종료되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디지털 유산 공증’, ‘비밀번호 관리 앱을 통한 위임 설정’, ‘사전 유언장 작성’ 등이 임시 대책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입법적 과제와 미래 방향: 새로운 권리의 등장
디지털 유산과 관련된 법적 쟁점의 핵심은 **‘사망자의 자기 결정권과 유족의 상속권 사이의 충돌’**이다. 현행 법제에서는 사망한 자가 생전에 정보에 대해 어떤 처리를 원했는지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 따라서 정보가 보호되어야 할지, 유족에게 공유되어야 할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사후 디지털 정보는 보호의 대상이자 동시에 유산의 대상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향후 입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성이 중요해진다. 첫째, 디지털 자산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이메일, SNS, 구독 서비스, 콘텐츠 플랫폼 계정, 클라우드, 암호화폐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를 법적으로 ‘상속 가능 자산’으로 명시해야 한다. 둘째, 생전의 사전 동의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후 계정 관리 기능이나 디지털 유언장이 효력을 가질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셋째, 사망자 정보에 대한 ‘접근 권리’와 ‘이용 제한’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유족이 재산상 목적 외에도 정서적 회복이나 기억 보존을 위해 정보 접근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정보에 대한 **‘사후 정보권’ 혹은 ‘디지털 권리 상속권’**이라는 새로운 권리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물리적 유산 개념을 넘어, 디지털 정체성과 프라이버시를 포괄하는 새로운 법질서로 확장되는 작업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점점 더 디지털화되고 있으며, 법 역시 이에 발맞춰야 한다.